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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시 전시가이드
꿈과 시 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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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 <십장생도>, 1920년대, 비단에 수묵담채
채용신(1850-1941)은 철종 1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886년 무과를 통해 관직을 시작하였고 1900년 어진화가가 되어 고종을 비롯한 많은 왕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또한 1910년을 전후하여 우국지사들의 초상화를 주로 제작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과 망국의 한을 담기도 했다. 한일의병장 최익현의 초상과 경술국치로 자결한 황현의 초상화가 특히 유명하다.
주로 초상화가로 명성을 누린 채용신의 <십장생도>는 그가 다른 장르의 작품도 훌륭히 소화하였음을 시사한다. 세밀한 붓질과 화려한 색채로 해, 산, 물, 돌, 소나무, 구름, 학, 사슴 등 전통적인 장생 불사의 물상이 묘사되었다. 그 외에도 공작, 기러기, 석류나무 등 다양한 영모와 화조가 등장하여 전체 화면에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다. 초상화의 경우 당시로서는 매우 근대적 기술이었던 사진을 활용하여 독특한 극사실 기법을 창안해 낸 것처럼, <십장생도>에서도 서양의 과학적 기법을 참조하여 공간의 깊이 있는 원근감을 획득하였다. 결과적으로 전통적 도상화가 자연스러운 풍경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이상향의 세계에 대한 갈구가 담겨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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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 <순종황제상>, 1923, 한지에 수묵초본
김은호(1892-1979)는 안중식과 조석진이 운영한 서화미술회에서 한국화를 연마하며 20대의 나이에 어용화가로 발탁되어 일약 유명세를 누렸다. 주로 왕실 인물들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는데,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 당시 덕수궁과 창덕궁을 드나들던 정황을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겨두기도 했다.
<순종황제상>은 전통적인 초상화 제작 과정 중 유지초본에 해당한다. 유지 초본이란, 두꺼운 장지(壯紙)에 생강즙을 먹인 유지(油紙) 위에 묵선으로 소묘의 밑그림(草本)을 그리는 단계까지를 말한다. 이 작업이 끝나고 합평(合評)에서 통과한 후 그것을 회견(繪絹) 쟁틀 밑에 붙여 위로 내비치게 하고, 작업에 들어가 완성된 것이 정본(正本)이다. 현재 정본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유지초본의 상태 또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의습은 간략하게 처리되었지만, 얼굴의 모습은 마치 사진을 보는 것처럼 완벽한 양감과 음영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국화의 전통기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서구 회화의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가능함을 과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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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 <시골소녀>, 1928, 비단에 채색
이영일(1904-1984)의 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어머니는 일본 귀족 출신이었다. 상당히 유복했던 그는 경기중학을 졸업하고 도쿄로 유학을 가서 화조화의 대가인 이케가미 슈호(池上秀?, 1874-1944)에게 8년간 사사했다. 귀국 후 숙명여자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는데, 후에는 그림을 그만두고 수원에서 접골원을 했다고 한다(김은호의 회고).
1928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에 올랐던 이 작품은 이영일이 일본 유학 중 한국을 오가며 제작한 작품이다. 자고 있는 동생을 포대기에 업은 채 맨 발로 서 있는 소녀와 땅 바닥의 낟알을 주워 모으는 소녀를 그린 것으로, 당시 “도회지 귀공자가 여행 중의 인상을 풍겨 높은 인상화에 지나지 않는다”(안석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도 작가는 “서울을 향하는 열차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차창 밖 풍경을” 보고 받은 인상을 그린 것이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비단 위에 그린 채색화로서 일본화풍의 영향이 농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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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 <초동>, 1926, 화선지에 수묵담채
이상범(1897-1972)은 충남 공주 출생으로, 아버지를 빨리 여의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비 없이 다닐 수 있는 경성 ‘서화미술원’에서 수학했다. 서화미술원은 안중식, 조석진이라는 두 한국화 거장이 운영하던 교육기관이었는데, 이상범은 1923년 같은 문하생들을 규합하여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고, 스승의 양식과는 차별화된 참신하고 새로운 양식의 한국화를 추구하게 된다.
선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받은 이 작품 <초동>은 병풍 크기와 비슷한 두 장의 한지를 이어 붙여, 선전의 일반적인 형태인 넓은 사각형의 포맷으로 변형한 것이다. ‘이상적인 산수’를 그리지 않고, 사생에 바탕을 두었을 법한 매우 ‘평범한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이른 겨울의 다소 황량한 들과 산은 전혀 특별한 것이 없기에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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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건, <목포교외>, 1942, 종이에 수묵담채
허건(1908-1987)은 허련(許鍊)이라는 조선말기 위대한 화가의 손자로, 가족의 화업을 이어 목포 일대를 중심으로 한국화가로 성장했다. 전통을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계승해서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부응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는 1942년 조선미술 전람회에 <목표교외>를 출품하면서 훨씬 더 실제적인 사생에 충실한 새로운 양식을 찾아냈다.
자신이 살았던 목포 근방 유달산의 풍경을 그린 이 작품은 작가가 실제로 현장을 여러 번 가보고 그린 것이라고 전한다(아들 허경의 인터뷰). 들판과 낮은 언덕, 농가의 평화로운 모습이 내려다보이며, 붉은 땅과 푸른 초목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흰 옷을 입은 아낙네가 머리에 새참을 이고 언덕을 오르는 모습도 정겹다. 섬세하게 색의 톤을 조절한 점들로 화면을 가득 덮은 이러한 양식은 일본 제전과 선전의 심사위원인 마쓰바야시 게이게츠(松林桂月)의 남화의 영향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허건의 동생 허림(許林) 또한 요절했지만 천재적인 작가로 이 무렵 일본 유학을 하며 이와 같은 점묘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주변의 평범한 실제 풍경을 대상으로 참신한 느낌을 강조함으로써, 한국화의 근대성을 모색하려 했던 노력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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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우, <인형 있는 정물>, 1927, 캔버스에 유채
이종우(1899-1981)는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경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3년 졸업 후 서올로 돌아와 고려미술원에서 유화를 지도한 바 있다. 한국 유화도입의 초창기 화가였던 그는 부유했던 집안 환경 덕분에 1925년 다시 파리로 가서 수학할 수 있었는데, <인형 있는 정물>은 그가 파리에 체류 중이던 1927년에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느 부인상>과 함께 살롱 도톤느에 입선되어, 한국 최초의 국제전 입선이라는 경력을 갖게 되었다. 유리상자 속에 들어 있는 인형, 커다란 원형의 흰 그릇, 흰 수련과 녹색의 잎사귀, 세 송이 마거리트 꽃, 그리고 벽에 걸리 타원형의 거울까지 여러 사물들이 한 화면에 공존하면서도 공간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유리 상자의 모서리 뒷면이 타원형 거울에 비추어 져서 더 깊은 공간감을 획득함과 동시에 감상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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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 <자화상>, 1915
고희동(1886-1965)은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0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한국인 최초의 유화가로 교육받았다. 동경미술학교의 전례에 따라 졸업작품으로 자화상이 제출되어야 했는데, 졸업작품 자화상과 부채를 든 이 자화상을 포함하여 총 3점의 고희동 자화상이 현존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15, Ko, Hei Tong’ 이라는 사인을 통해,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해인 1915년 귀국 직후에 제작되었음을 확인케 한다. 비록 여름의 분위기를 전하는 모시적삼과 풀어헤친 옷섶은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지만, 한쪽 방향을 응시하는 굳은 시선과 근엄한 표정은 단단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은 배경을 이루는 풍경화를 통해 암시되고 있지만, 더 직접적으로는 서가에 꽂힌 양서를 통해 지식인의 이미지를, 부채(붓이 아니라)를 든 채 여름을 즐기는 한가함을 통해 사대부의 여유를 보여주려 한 듯 하다. 2011년 이 작품이 근대회화로서는 이례적으로 국가 문화재에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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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욱, <피리부는 소녀>, 1941(청동주조 1971년)
윤승욱(1915-1950)은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휘문고등학교에서 장발에게 지도받았고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소조부에서 수학하였다. 김복진에 이어 한국 근대 조각계를 대표하는 조각가였던 그는, 1946년 이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
1941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받은 <피리부는 소녀>를 포함하여 여러 작품이 기록에 남아있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이것이 유일하다. 원래 선전 출품 당시 석고로 제작된 것을 미술관이 보관하고 있고,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은 1971년 청동으로 주조한 것이다. 단정한 단발머리를 한 나체의 소녀가 오른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왼쪽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 피리를 불고 있다. 피리를 든 팔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신체의 자세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어, 고전적인 인체 모델링에 뛰어났던 작가의 기량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조각에 피리 소리라는 청각적인 요소를 끌어 들여 서정적 분위기를 한층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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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 <노란저고리>, 1929, 캔버스에 유채
김종태(1906-1935)는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해서, 1926년 선전 입선 이후 총 22점의 입상작을 내놓았던 선전 스타였다. 경성사범학교를 다녔고 서울 주교(舟橋) 보통학교의 미술교사로 재직하다가 1930년 학교를 그만 두고 일본에 가서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 1882-1958)에게 유화를 배우고 일본 이과전에 입선한 경력이 있다. 귀국하여 1934년 선전 서양화부 최초의 추천작가가 되었으나, 이듬해인 1935년 장티푸스로 갑자기 사망하여 29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기록을 통해 볼 때 그는 상당히 많은 작품을 제작했던 것으로 보이나 유존작이 많지 않다. <노란 저고리>는 ‘一九二九年 金鍾泰’라는 사인을 통해 1929년(23세) 의 작품임을 확인하게 한다. 전통 동양화의 경우처럼 왼쪽 위에 세로의 한문글씨로 적혀진 이 사인은 그가 유화를 그리면서도 의식적인 뿌리를 어디까지나 동양적, 한국적인 것에 두고자 했음을 암시한다. 이젤을 배경으로 다소곳이 한복을 입고 앉아있는 이 소녀는 수줍은 듯 불그레한 볼을 한 채 모델을 서고 있다. 유화를 그리면서도 마치 묵화를 그리듯 단숨에 대상을 포착하여 빠른 필치로 옮겨 낸 것은, 김종태의 전형적인 필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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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 <남향집>, 1939, 캔버스에 유채
오지호(1905-1982)는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서울 휘문고보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30년대에는 김주경과 함께 녹향회에 참가하였고,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을 1938년 총천연색으로 출간하여 세간의 이목을 받기도 했다. 1935년 개성 송도고보의 교사를 지낸 바 있고, 해방 후에는 조선대 교수를 지내며 일생의 대부분을 광주에서 보냈다.
<남향집>은 작가가 송도고보 재직 시절 자신이 살던 집을 그린 것이다. 햇살이 쏟아지는 한낮 남향집 담장 위로 나무의 그늘이 선명하게 드리워지고, 빨간 옷을 입은 작가의 딸이 집 밖을 조심스레 내다본다. 하얀 강아지는 오후의 따스함을 만끽하며 낮잠을 즐기고 있다. 깊고 푸른 하늘의 청명한 공기가 생생하게 느껴질 것만 같다. 모든 시각적 경험은 ‘빛’의 효과에 기인한 것이다. ‘그늘에도 빛이 있다’고 믿었던 오지호는 여기서 나무의 그늘조차 푸른 빛과 보라 빛으로 그려넣었다. 한국적 인상주의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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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현, <무녀도>, 1941, 캔버스에 유채
김중현(1901-1953)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게 점원, 버스 차장, 총독부 토지조사국 직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고 여가로 작품을 제작하며 선전에 발표했다. 1925년부터 선전에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며 화가의 명성을 얻었고, 한국화와 유화 모두를 구사하여 1936년에는 두 부문 모두에서 선전 특선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1941년 작품인 <무녀도>는 해석의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어두침침한 방 안에서 무녀가 요령을 울리며 춤을 추고, 무녀의 좌우에는 악사들이 장단을 맞춘다. 방문턱에는 흰 옷을 입은 소년과 붉은 저고리의 소녀가 다소곳이 앉아 있다. 집 안에는 벽 위에 늘어선 단군 등의 조상신이 무녀를 호위하듯 버티고 있다. 이 때는 이미 대동아전쟁으로 군국주의 분위기가 강해져 갔는데, 이러한 시점에 조선 민중의 정서와 의지를 암시하는 작품이 제작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유난히 강조된 흰 색 옷의 소년도 일종의 민족적 희망을 암시하는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다. 김중현은 이 작품 외에도 주막에서 술을 마시거나 바둑을 두는 노인, 농악놀이, 일하는 아낙네와 소년 같이 서민의 일상과 토속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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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군홍, <여인좌상>, 1936, 캔버스에 유채
임군홍(1912-1979)은 서울에서 태어나 김종태가 교사로 재직했던 주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양화연구소를 다녔으며, 1931년 선전에 입선하면서 화가로 데뷔했다. 1930연대 녹과회를 조직하여 그룹 활동을 하다가 만주로 가서 한국(漢國)미술 광고사와 같은 상업미술사를 운영하였고, 광복 후 귀국하여 인쇄소를 겸한 광고미술사를 경영하며 양화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오랫동안 망각에 묻혀 있었던 작가였으나, 1984년 유족들이 소중히 보관하던 작품 80여점을 처음 공개하였고, 이 중 선전에 출품되었던 <여인좌상>을 비롯한 주요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다.
<여인좌상>은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신여성이었던 작가의 친척(처형의 딸)을 모델로 하였다고 전한다. 개량한복을 입고 구두를 신은 이 여성은 손에 외국 잡지를 들고 있다. 벽에 걸린 액자의 새 그림은 자유롭게 날고 싶은 여인의 욕망을 은유적으로 암시하는 듯하다. 즉흥적인 붓질과 담백한 분위기가 임군홍의 특징적인 양식을 대변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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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진, <미륵불>, 1935, 청동
한국 최초의 근대 조각가였고 걸출한 미술평론가였던 김복진(1901∼1940)은 약 40년간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한국 미술계에서 실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1920년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였고, 한국과 일본의 오가며 토월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1928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된 후 약 7년간 투옥생활을 겪어야 했다.
투옥 전 1920년대에 소녀상과 같은 일반적인 근대 조각의 소재를 택했다면, 감옥 시절과 출옥 후 제작한 것은 여러 점의 불상 조각이었다. 대표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11m 높이에 달하는 김제 금산사 미륵전의 본존상인데, 이번 전시에 전시되는 작품은 금산사의 대형 불상을 제작하기 위한 1:10 크기의 석고 모형을 모본으로 2000년 미술관이 청동 주조한 것이다. 금산사는 당시로서는 독특하게도 ‘공모’를 통해 이 대형 프로젝트를 맡아 줄 조각가를 선정했는데, 김복진은 현재 계룡산 소림원에 남아있는 석고 미륵불의 모형을 제출하여 당선된 것으로 보인다. 시무여원인으로 왼손에 보주 든 채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 불상은 기본적으로 불상의 전통적 도상을 따른 것이지만, 벌어진 어깨를 통해 강조된 당당한 자세, 유려한 선의 흐름과 몸체의 율동감은 근대조각의 면모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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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 <파란>, 1923, 캔버스에 유채
주경(1905-1979)은 서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1924년 고려미술회에서 고희동과 이종우의 미술지도를 받으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후 대구에 정착하여 미술교육가 및 정치가로도 활약했다.
대체로 아카데믹한 화풍의 사실주의적 작품을 주로 그렸던 데 반해 <파란>은 상당히 예외적인 실험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23년 서울에서의 수업기에 제작되었다는 작품의 제작연도에 대해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다. 총체적인 혼란과 파국의 상황을 추상적으로 해석하여, 격동적으로 출렁이는 선들, 날카롭게 내려 꽂히는 면들로 형상화하였다. 회화에 ‘운동감’을 도입한 서구 미래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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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 <친구의 초상>, 1935, 캔버스에 유채
구본웅(1906-1953)은 1925년 고려미술원에서 김복진에게 조각을 배우고 일본으로 건너가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일본에서도 주로 아카데미즘적 경향과는 구별되는 재야 단체의 활동에 깊이 동조하였고, 귀국 후에도 매우 표현주의적인 경향의 독특한 화풍을 일궈냈다.
그의 단짝 친구였던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을 그린 이 초상화는 독특한 두 예술가의 이력을 암시하듯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어두운 배경에 모자를 눌러 쓰고, 초록빛을 띈 흰색 얼굴의 한 남자가 무표정하게 담뱃대를 물고 있다. “우리들이 산 그 시대는 식민지 치하라는 치명적인 조건 하에서 아무도 절대로 행복할 수 없었다”는 이상의 아내이자 구본웅의 이모 변동림의 언급처럼, 시대의 한계를 안고 살아간 예술가들의 고뇌가 이 한 점의 작품에 절실하게 묻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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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 <여인>, 1930년대, 캔버스에 유채
구본웅(1906-1953)은 1925년 고려미술원에서 김복진에게 조각을 배우고 일본으로 건너가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일본에서도 주로 아카데미즘적 경향과는 구별되는 재야 단체의 활동에 깊이 동조하였고, 귀국 후에도 매우 표현주의적인 경향의 독특한 화풍을 일궈냈다.
그가 1930년대 중반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인>은 한국 근대기 누드화의 독특한 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일본 작가 사토미 가츠조(里見勝藏)의 1928년작 <여인>과의 유사성이 지적되어 왔는데, 1931년 일본의 독립미술협회 창립전에서 구본웅은 그 작품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가슴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자세는 매우 과감하며, 색채 또한 검은 색, 빨간 색, 녹색, 흰색을 주조로 하여 강렬한 인상을 준다. 원시성과 생명력을 새로운 미술의 지향점으로 인식한 서양의 야수파가 1920-30년대 일본에서 소화되었고, 그러한 방식이 구본웅의 작품에서 재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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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술 <해방>, 원작 소조, 1960년대 후반 청동주조
김만술(1911-1996)은 경주 출생으로 1942-44년 일본 히나코 지츠조(日名子實三) 조각연구소에서 수학하였다. 해방 후에는 경주에 정착하여 경주예술대학에서 교육자로 활동했고 다수의 기념조형물을 제작한 바 있다.
<해방>은 1947년 원래 소조로 제작된 것을 후에 청동으로 주조한 것으로, 현재 10여점에 달하는 청동 에디션이 전해지고 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은 1947년 제작된 소조 원본을 구입하여 수복 작업 중에 있다. 긴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을 맞은 조선의 상황이, 몸에 묶인 밧줄을 풀어내는 한 인물의 신체를 통해 은유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안간힘으로 포승을 풀어내기 위해 얼굴과 어깨, 손 등 신체의 각 근육들이 극도의 긴장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부릅뜬 눈을 통해 보이는 현실은 해방 후에도 결코 녹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극심한 혼란과 대립이 난무하던 시대의 상황을 응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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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채, <폐림지 근방>, 1949, 캔버스에 유채
류경채(1920-1995)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40년대 일본에서 수학하였고, 1940년 선전에 입선하여 화단에 등단했다. 서울사범학교의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국전이 열렸던 1949년,이 작품 <폐림지 근방>으로 대통령상을 받으며 일약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후 대학교수 및 국전 심사위원으로서, 해방 후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폐림지 근방>은 왕십리의 쓸쓸한 풍경을 구체적인 모티프로 삼았다고 하지만, 거의 반(半)추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해방은 되었으나 아직도 폐허가 된국토, 혼란스러운 사회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어떠한 무질서 속에서도 자연의 생명력은 끈질기게 솟아 올라 작품에 우울한 활력을 불어넣고있다.이제 이 '새로운 회화'작품에는 다채로운 색,비정형적 형태,마티에르의 강조 등 새로운 조형 요소들이 전면으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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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고석, <범일동 풍경>, 1951, 캔버스에 유채
박고석(1917-2002)은 1917년 평양에서 태어나 1930년대 일본대학에서 유학하면서 주로 재야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야수파와 표현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표출했던 그는 구본웅, 이중섭 등과 함께 한국의 표현파 화가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중 피난 생활 속에서도 예술가들이 밀집된 부산에 머물며 더욱 활기찬 예술활동을 펼쳤던 그는 당시의 분위기를 <범일동 풍경>에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부산 범일동은 이중섭, 김환기, 한묵 등 여러 화가들의 피난지가 된 바 있다. 철로변을 하릴없이 서성이는 이들 피난민의 애환이 거친 필치, 투박한 윤곽선, 두터운 물감 처리를 통해 시각화되었다. 검은 선을 주조로 한 어둡고 대담한 화면처리는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프랑스 작가 조르주 루오의 화풍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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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우, <폭격이 있은 후>, 1957
권영우(1026- )는 해방 직후 서울대학교가 설립되자마자 입학하여 1951년 졸업한 소위 해방 1세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전쟁 중 입대하여 공군본부 정훈감실 소속의 종군미술대에 배속되어 전쟁관련 그림을 그려야 했고, 당시의 경험이 <폭격이 있는 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작품은 종군화가단 시기 그린 스케치를 기초로 하여 195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출품하기 위해 종이 위의 먹으로 재제작한 것이다. 작가 스스로의 기록에 의하면, 작품의 소재를 정하기 위해 주변의 전쟁 흔적을 찾던 중 폭격으로 파괴된 서울 용산역 구내의 광경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기관차와 화차, 유조차 등이 나뒹굴고 레일이 엿가락처럼 꼬여 있는 뒤편에 굴뚝으로 보이는 건물은 기관차 차고였던 곳이다.” 해방 후 한국화단은 일제 강점기 채색화의 유행에서 벗어나 수묵의 농담만을 활용한 문인화적 화풍을 지향하고 있었다. 동시에 한국화의 현대성을 모색하기 위한 추상화 경향도 일어났다. 이 작품은 한국 전쟁의 기록일 뿐 아니라, 1950년대 한국화의 새로운 모색을 증거하는 자료로 그 의미가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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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명, <정원>, 1939, 종이에 수채
김수명(1919-1983)은 칠곡 왜관에서 태어나 1939년 대구사범학교 심상과를 졸업하고 평생 대구 일대을 기반으로 화가이자 교육자로 활동했다. 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38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고, 초기에는 <정원>과 같은 맑고 참신한 수채화를 주로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은 어떤 동경과 향수를 자아내는 낙원 같은 풍경화들이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해(20세)에 제작된 <정원>은 수채화로서는 상당한 크기의 대작이다. 전경에 화분들, 석류 나무가 나란히 늘어져 있고, 배경에는 장독대와 흙으로 된 담장이 정겹게 펼쳐진다. 수채물감의 농도 조절을 통해 공간의 구성을 충분히 예측하게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화면은 평면적으로 인식된다. 정원 가득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듯 대상 표면이 빛의 반사로 부서진다. 화가 정점식(1917-2009)은 김수명에 대해 “저 어려운 시대적인 상황을 체내에서 연소시키고 겉으로는 무사 무난하게 보이는 낙천주의”의 화가라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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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마을>, 1956
장욱진(1917-1990)은 일본 동경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과 함께 신사실파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추상화의 시원을 이루는 작가들과 교유하였다. 장욱진이 택하는 소재는 새, 나무, 산, 물, 집, 사람들로 공통적으로 흔히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마을> 또한 그의 전형적인 작품 소재의 하나였다. 이 작품은 그가 피난지 부산에서 고향 연기군으로 돌아온 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전후의 혼란한 외부세계와는 무관하게 평화롭기만 한 마을의 풍경이 단순화된 형상들로 그려졌다. 해, 나무, 집과 사람, 동물이 어우러져 마을을 이룰 뿐이다. 어린아이의 그림과 같은 천진한 느낌은 원근법에 대한 무시, 원시적이고 단순화된 형태들에 기인한다. 소박한 아름다움이 최고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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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할아버지와 손자>, 1960
박수근(1914-1965)은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거의 독학에 가까운 방식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나, 그의 전형적인 화풍은 1950년대 이후 완성되었다. 특히 한국의 화강암을 연상시키는 거친 마티에르를 내기 위해 계속해서 붓질을 더하는 인고의 과정을 거쳐 탄생된 그의 작품은 한국적 미감을 잘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외국인 컬렉터에 의해 수집대상이 되었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 박수근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그저 단순하고 충직하게 일생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순간이 그 무엇보다 위대한 예술작품이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의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여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라고 박수근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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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환, <천도와 아이들>, 1940년대, 마포에 크레용
진환(1913-1951)은 전라북도 고창 출생으로 서울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다가 자퇴하고, 화가의 길을 위해 동경으로 가서 일본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유학 중 만난 이중섭, 최재덕, 이쾌대, 문학수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1941년 조직하여 활동했다. 그는 한국 전쟁 중 고향으로 가는 피난길에 유탄을 맞아 38세의 비극적인 생을 마쳤다.
<천도와 아이들>는 조선신미술가협회 회원들의 공통적인 분위기를 대변해주는 작품이다. 이들은 통상 소, 새, 아이, 설화 등을 소재로 향토적이면서도 낙천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주로 제작했다. 이 작품에서도 아이들, 복숭아, 꽃, 물고기처럼 보이는 새 등이 등장한다. 상식적인 크기를 뛰어넘는 꽃과 복숭아, 벌거벗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은 동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순수하고 아름답다. 동요가 곁들인 그림책을 손수 만들기도 하고 동시집의 발간을 준비하기도 했던 그는, 시대의 어둠을 애써 벗어나 인간의 순수함이 영원히 살아있는 낙원과도 같은 세상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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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부부>, 1953
이중섭(1916-1956)은 일본인 부인과의 사랑과 이별, 비극적인 죽음 등 개인적인 일화를 통해 대중에 깊이 각인된 한국 근대기의 대표 작가이다. 그는 어려운 생활 환경 속에서도 항상 천진난만한 어린이와 동물들이 등장하는 ‘낙원’과 같은 이미지의 작품들을 즐겨 그렸다.
<부부>는 두 마리의 새가 자유로이 하늘을 날며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제목을 통해 볼 때 작가 자신과 사랑하는 아내 마사코(한국 이름 이남덕)와의 열애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푸른 색과 붉은 색이 화면 전체를 덮은 가운데, 아래에 있는 새의 붉은 다리가 배경 하늘 높은 곳의 붉은 색조와 조응하기도 한다. 새 두 마리의 경계도, 하늘과 새들의 구분도 간데 없이 혼연히 일체되어 완벽한 하나로 어우러진다.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더욱 더 깊고 두텁고 열렬하게, 무한히 소중한 남덕만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열애하고 / 두 사람의 맑은 마음에 비친 인생의 모든 것을 참으로 새롭게 제작 표현하면 되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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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애들과 물고기와 게>, 1950년대
이중섭(1916-1956)은 일본인 부인과의 사랑과 이별, 비극적인 죽음 등 개인적인 일화를 통해 대중에 깊이 각인된 한국 근대기의 대표 작가이다. 그는 어려운 생활 환경 속에서도 항상 천진난만한 어린이와 동물들이 등장하는 ‘낙원’과 같은 이미지의 작품들을 즐겨 그렸다.
그가 제주도 피난 시절에 제작한 <애들과 물고기와 게>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중섭은 한국 전쟁 기간 중 부산, 통영, 제주도를 전전하여 피난 생활을 하였고, 특히 1951년 봄에는 제주도 서귀포에 정착하여 해초와 게로 주식을 삼는 생활을 시작했다. 이 무렵 짧은 가족과의 해우 속에서 오히려 행복한 시기를 보냈던 그는, 어린이의 밝은 웃음, 동물들의 단순한 형태, 아이와 동물이 어우러져 형성되는 즐거운 율동을 통해 순수한 아름다움의 정수를 잡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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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원, <12각 건칠화병(쌍)>
강창원(1906-1977)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경미술대학 “칠공예과”에서 건칠(乾漆)을 공부하였다. 졸업 직후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제국미술전람회 등에서 여러 차례 특선을 수상하면서 “천재 건칠공예가”로 알려졌다. 그러나 순탄하지 않은 결혼생활과 제자의 배신 등으로 불운한 개인사를 겪으며 수 십년간 방랑생활을 하다가, 약 60세의 나이에 작품활동을 재계하여 약 10년간 불꽃을 태우다가 71세의 나이에 작고하였다.
<12각 건칠화병(쌍)>은 작가가 돌아가신 해에 제작된 것으로 그의 최후의 열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건칠은 석고나 진흙으로 만든 형태 위에다 생칠(生漆)과 쌀풀을 혼합한 잿물에 빤 모시나 마를 여러 번 바르고 건조 시킨 후 석고나 진흙은 제거하여 완성된다. 즉 천으로 기형을 유지해야 하기에 제작이 까다롭고 매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인고의 작업이다. 그의 건칠 작업들은 완벽한 기법적 완성도를 보여줄 뿐 아니라 대담하고 단순한 형태를 통해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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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론도>, 1938, 캔버스에 유채
김환기(1913-1974)는 전라남도 신안군 기좌도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화가가 되기를 반대하는 부모를 떠나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긴조(錦城)중학교, 일본미술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35년 이과회에 입선하였고 1938년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이 작품 <론도>를 출품한 바 있다.
이 작품은 실험적이고 다양한 양식을 구사했던 김환기의 초기작업의 예를 보여준다. 그랜드 피아노의 윤곽을 암시하는 선들과 이 음악에 조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원색의 면들 속에 구성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음악적 운율을 회화적 평면에 옮겨놓음으로써, 청각과 시각이 절묘하게 맞닿는 신선한 경험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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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산월>, 1960
김환기(1913-1974)는 전라남도 신안군 기좌도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화가가 되기를 반대하는 부모를 떠나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긴조(錦城)중학교, 일본미술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35년 이과회에 입선하였고, 일본의 재야 그룹전 활동을 통해 입체주의, 구성주의 등 서구의 최신 미술사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소재는 일관되게도 한국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소박하고 솔직한 것들이었다.
1956년-1959년 파리 시절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제작된 <산월>은 한국적인 서정적 소재를 택하면서도 훨씬 더 단순화되고 반추상화된 작품이다. 그가 즐겨 쓰던 푸른 색조가 화면의 기본을 이루는 가운데, 산과 달, 땅과 인간이 평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자연과 인간의 평범하지만 기적적인 공존을 제한된 색채 속에 녹여낸 그의 작품은, 언제나 묘한 시적 감성과 독특한 서정성을 불러 일으킨다.